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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아퀴나스
- 생애/작품/개관
생애/작품/개관
참조: Josef Pieper, Kurze Auskunft ueber Thomas von Aquin, Koesel, 1940.
생애와 작품
-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들 가운데 어느 책이든, 혹은 심지어 그의 대단히 추상적인 작품인 『삼위일체론』의 어느 한쪽을 펼쳐 읽더라도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인상을 전해 받을 것이다: 이것은 살과 피를 가진 한 사람에 의해서 쓰인 작품이다. 하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촘촘한 구조를 살펴보게 한다면, 그는 분명 다음과 같이 물으려 할 것이다: 이 문장들은 참으로 한 살아 있는 사람에 의해서 집필된 것일까? 또는 차라리 한 살아 있는 사상가의 호흡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정식화된 객관적 내용이 아닐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의 생생한 산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결코 (뿌리와 줄기에서 꽃이 피어나듯 그것들이 거기서부터 피어난) 그의 개인적 삶이라는 그 원천을 잊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나 수정(水晶)이 거기서부터 형성된 본질적 액체라는 기원을 거의 시사하지 않듯이, 성 토마스의 언어도 그 기원이 된 생생히 살아 숨쉬던 정신을 거의 시사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오로지 피상적인 해석자만이 그 작품의 어지럽혀지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 평온함으로부터 그 저자 자신이 내적-외적 교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추정할 것이다. 반면에 『신학대전』이 다만 근본적으로 평온한 마음을 지닌 사람의 작품일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성 토마스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대가다운 개관을 “수도원 다락방의 침묵” 속에서 발견하고 정밀하게 그려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간 세상의 사건들로부터 단절된 어떤 목가적인 은둔 영역이 아니었다. [...] 그것들은 흔히 상당한 정밀함이 요구되는 전기적 연구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교란되지 않는 객관성과 이런 깊은 빛나는 평화가 어지러워지지 않기는커녕 그 자체로 투쟁 속에서 소진된 삶으로부터 자라날 수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우리에게 그 사람의 특별한 성질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그의 작품은, 우연히 어떤 노골적으로 투쟁적인 (그러나 전투의 절정에서도 결코 진리와 사랑의 규범들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따라서 그 근본적 평화를 잃지 않는) 정신적 기질에 대한 직접적인 반영과 증거를 보여준다. 45세에 쓰인 『영성생활의 완성』은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이것에 반대되는 말을 하고자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환영한다. 왜냐하면 어떤 반대에 맞서는 것보다 참과 거짓이 더 잘 밝혀질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실상 잠언 27장 [17절]에서는 ‘쇠는 쇠로 다듬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누가 옳은지는]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아멘.”
- 로레토와 벨카스트로의 영주인 아퀴노의 란둘포(Landulfo de Aquino) 백작은 호헨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황제의 가장 충실한 가신 가운데 하나였다. 황제와 교황 사이의 극렬한 투쟁의 시기 동안 그의 막내아들 토마스는, 그 투쟁과는 동떨어져 있고 그보다 월등한 직분, 곧 진리를 설파한다는 사제적 직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황제의 영토와 교황령 사이의 경계선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역시 황제의 한 성 역할을 하고 있던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런 처지에서 토마스가 외부적 교란과 위험들을 벗어난 안전한 삶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1239년 초 프리드리히 황제가 파문(破門)되었을 때, 몬테 카시노는 직접적인 전쟁터로 바뀌었다. 절반쯤은 수도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던 그 성의 수비대는 [적의 수보다] 두 배를 넘었다. 성채는, 20년 전에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칠리아 왕국으로 진격했던 황제 자신의 명으로 확장되었다. 같은 해에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 무리에는 15세가 된 토마스 아퀴나스도 섞여 있었다.
이 탈출은 그 소년을 나폴리(Napoli)로 이끌었는데, 그것의 그의 특수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그를 은둔생활로부터 빼내어 당대 지성적 전투의 격전지 한가운데로 몰아넣었다. 토마스가 태어나던 해에 설립된 나폴리 대학은 “신학생들을 양성하는 학교가 아니라 황제의 봉사자들을 양성하는” 최초의 “순수 국립대학”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 학교가 교회에 맞서 작동하도록 기획했다. 여기서 토마스는 관례에 따라 “자유 학예”(artes liberales)를 공부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일랜드 출신의 페트루스(Petrus d'Hibernia)의 지도 아래, 당시 교회가 대단히 경계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론’이란 정통적인 이들에게는 단지 허무주의자, 자유사상가, ‘계몽가’와도 견줄 수 있는 독설적인 별명에 불과했다. 바로 이 나폴리에서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의 첫 세대를 가득 채울 저 도시의 “젊은이 운동”의 불꽃이 이 젊은 신참의 가슴 속에서도 처음으로 피어나게 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와 ‘탁발수도자’라는 두 단어는 13세기 초반에 우리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격정적인 폭력으로 교회를 얼룩지게 만든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논쟁들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탁발수도회는 승인과 배격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 있다. 토마스가 나폴리에 왔을 때에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de Assisi, +1226)가 선종한 지 15년이 지났을 때였는데, 그 두 탁발수도회는 아직 그 어떤 공적 승인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에 모든 교황의 승인과 특전들은 기성 사회(세속 영주들, 신흥 세력들, 도시의 중산층, 재속 성직자들)가 이 주목할 만한 새로운 “가난뱅이들”을 “제정신이 아니”라고(이것은 어느 면에서는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심지어 “이단적”이라거나 “그리스도의 적의 자식들”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시대의 역사적 충동 등을 포함해서 그토록 많은 자양분들로부터 자라나는 젊은 영성 운동의 급성장을 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것이 마치 그들의 정당한 몫이기라도 하듯이, 귀족 가문의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우리는 또한 파리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공동체들이 학생회로부터 많은 신입회원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록은 볼로냐 대학에서도 비슷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나폴리 대학에서도 역시 비슷했다. 이 모든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건들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불빛의 조명과 매력과 같은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1231년 파리 대학의 장 드 생질스(Jean de St. Giles)라는 교수가 생자크의 도미니코 수도공동체에서 복음적 가난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 강연 도중에 그는 무아지경이 되어서 강연을 중단하고, 장상에게 수도회 입회를 청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도미니코 회원이 되고 나서 그 강연을 계속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도미니코회원들이 파리 대학에서 두 번째 강좌를 획득하지 못했더라면, 혹자는 이 이야기를 하나의 전설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강좌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20년 뒤에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새로운 것들’ 안에 내재하는 힘이 이 나폴리 출신의 젊은 인문학도를 불가항력적으로 논쟁으로 몰아갔고,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약관의 20세에 토마스는 가난의 이상을 학업의 이상과 결합시키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이 결정은 토마스가 프리드리히 2세의 한 가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황제에게 도발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의 동생이 강력한 몬테 카씨노 대수도원장이었고, 자신의 아들이 탁발수도사보다는 이 거의 군왕과도 같은 [대수도원장] 직분의 계승자가 되기를 선호하고 있던) 란둘포 백작에게 탁발수도회 운동 전체가 실제로 낮은 등급의 명예롭지 못한 어떤 것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 판단은 그의 가족 전체의 운명과도 직결된 일이었다.
그리고 비록 토마스의 결정에서 정치적 동기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심지어 교회 정치조차도(이 젊은이는 이미 세속 권력에 대한 진리의 우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힘의 정치에 의해서 지배되는 일그러진 마음의 거울 속에서 그의 탁발수도회 입회는 얼마든지 황제를 거슬러 교황 편을 드는 결단으로 비칠 수 있었고,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의 새로운 공동체들은 교황의 특별한 친구들이자 도구들로 간주될 수 있었다. 따라서 ‘설교수도회’ 형제들이 서둘러 토마스를 황제의 구역에서 빼내고 그의 가족들로부터 갈라놓으려 한 것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즉시 그를 파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게 조치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쉽게 그이 미래의 명성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중에 그는 형제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것이 황제 자신의 동의나 심지어 도움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는 많은 지표들이 있다. 어쨌든 교황 인노첸토 4세는 이 폭력행위를 거슬러 황제에게 항거하였으나 허사였다. 토마스는 1년이 넘도록 로카세카(Roccasecca)라는 아버지의 성에 갇혔다. 그리고 여동생의 도움으로 마침내 아버지의 성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즉시로 중단되었던 파리 여정에 착수하였다. 토마스의 여행 동료인, 당시 수도회 총장장이던 요한 투토니쿠스와 나중에 그의 스승이 되는 알베르투스 마뉴스가 둘 다 독일인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요한은 뮌스터 인근 교회 구역 출신의 웨스트팔리아인이었다. 같은 해인 1245년 토마스가 프랑스로 움직였을 때, 일반 총회가 리옹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황제를 폐위시키고 그의 노선을 박탈하였다. 이 위협적인 소용돌이가 서방 세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려 하고 있던 때에 토마스는 파리에 도착하였다. 이 도시는 너무도 탁월한 신학 탐구의 중심지여서, 중세 시대 전체에 걸쳐서 노트르담 대성당 근처의 이 대학과 연결을 맺지 않고 쓰인 『신학대전』은 거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토마스는 생자크(St. Jacques)의 설교 수도회가 긴박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도, 프란치스코회와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모욕이나 공격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날은 드물었다. 프랑스 왕 성 루이는(나중에 그는 자기보다 10살 젊은 성 토마스의 친구가 된다) 수도회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왕궁수비대를 급파할 필요를 느꼈다. 수도회 전체가, 도처에 만연되어 있지만 특히 파리에서 더욱 극렬한 이 악을 빨리 종식시켜 주시기를 하느님께 간청하는 특별기도를 바쳤다,
스무 살을 갓 넘은 토마스는 그의 힘, 그의 느릿한 움직임, 특유의 침묵 때문에 그의 동료 학생들로부터 “벙어리 황소”라는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으로부터 심하게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들이 평화로운 수도원 다락방이라는 목가적인 그림을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 전혀 다른 종류의 한 사건은 그의 전적인 주의를 끌었음에 틀림없다. 토마스가 도착하던 해에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는 파리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스승과 제자의 만남으로부터 발전된 우정과 그들의 공동 작업의 풍성함은 서방의 지성적 면모를 변경시킬 것이었다. 그들이 만난 지 몇 년이 지나 쾰른 대성당의 주춧돌이 놓이던 1248년에 알베르투스와 토마스는 쾰른으로 건너갔다. 알베르투스는 거기서 설교수도회 기숙사를 설립하라는 명을 받았다. 토마스에게 이 기간은 결실 풍부한 침묵과 지성적 원숙함의 선물을 제공했다. 그의 쾰른 체류 중반선은 그 세기의 중반선과 일치하였고, 토마스에게도 정확히 그의 생의 중반선이었다. 쾰른 시기는 토마스가 파리로 돌아가 교육의 소임을 준비하도록 소환하는, 수도회 총장 요한 튜토니쿠스의 서한으로 끝장이 났다. 그 동안 파리 대학에서는 재속(在俗) 성직자들과 탁발수도자들 사이의 해묵은 전쟁에서 새로운 불꽃이 폭발하고 있었다. 이제는 교육의 요점들뿐만 아니라 강좌 때문에도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영예롭게 수행되는 전쟁이 아니었다. 전투적인 기욤 생타물(Guillaume de Saint-Amour)을 필두로 하는 전통 세력의 완고한 옹호자들은 매우 의심스러운 무기들을 사용하였다, 거짓, 비방, 위조, 명예훼손 등은 결코 비상식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도미니코회 학자들이 재속 성직자 교수들을 협박하였고 심지어 대학 학장마저도 자기들의 압박 전략으로 위협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가 되돌아간 소용돌이의 중심이었다.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Bonaventura)와의 새로운 개인적 접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이 두 성인 교수들 사이의 우정에 대해서 옛 보고들이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위대한 학자들은, 그들의 추종자들의 반목을 넘어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같은 해에 각기 자신의 수도회에 들어간 토마스와 보나벤투라는 당시에 동일한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탁발수도자들로서, 대학에서 독립적인 교육 강좌를 시작할 수 있는 허락을 거절당했다. 명시적인 교황의 명령의 결과로 두 사람은 마침내 같은 날에 허락이 승인되었다.
우선 토마스에게는 그 허락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대학이 그의 취임 강연을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의 강독들 가운데 하나에서 철학부의 한 공식 구성원과 (그 사이에 추방된) 기욤 생타물의 추종자가 일어나 탁발수도자들을 풍자하는 시를 큰 소리로 암송하였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이 토마스가 파리 대학에서 가장 사랑받는 유명한 교수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의 첫 번째 교육 소임기의 이 폭풍같은 초기 몇 년 동안 토마스는 그의 첫 작품인 『존재자와 본질』(De ente et essentia)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날카로운 명료성으로 파노라마식 개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가 그 와중에 작업해야 했던 다툼과 시기의 시끄럽고 우아하지 못한 격동도 단 한 문장의 거울조차 흐리게 만들 수 없었다. 성인에 대한 성인과 거의 동년배의 가장 이른 전기는 베네벤토의 원장인 톨로메오 루카(Tolomeo da Luca)에 의해 쓰였는데, 그것은 반복적으로 그의 엄청난 집중력을 언급하고 있다.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를 집필하는 동안 그의 감각들은 자주 마비된 것 같았다. 한번은 밤에 구술을 하던 중에 그는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촛불이 흘러넘쳐 내려와 자신의 손가락을 그을리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 제목에서 받는 인상과는 달리 결코 논쟁적인 작품이 아닌 『대이교도대전』은 이탈리아에서 집필되었다. 파리 대학에서 꼬박 3년간 신학 교수로서 가르친 뒤에 토마스는 당시에는 종종 비테르보나 오르비에토에 자리잡곤 했던 교황 궁정으로 소환되었다. 그때 이후로 죽기까지 토마스는 더 이상 2-3년간을 같은 장소나 같은 소임에 머물지 못했다. 그는 3년 동안 우르바노 4세의 궁정에서 가르쳤다, 그 뒤에는 로마로 가서 2년 동안 수도회 기숙사를 설립할 소임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자신의 방대한 주저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개요를 구상하고, 그 제1부를 작업하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에 7년간 혼신의 힘을 쏟지만, 끝내 온전히 다 마치지는 못했다. 이처럼 로마에서 2년을 체류한 다음에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4세가 그를 다시 한 번 더 비테르보의 교황 궁정으로 불렀다. 이 탁발수도자를 나폴리의 대주교로 지명라려던 이전에 했던 시도는 교회법적으로 지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극구 고사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어떤 이들은 탁발수도회 저 첫 세대 가운데 관행이었다고 간주할 수도 있을 성 토마스의 이 거절은 결코 관행이 아니었고, 오히려 전적으로 개인적 결단에 달려 있었다. 우리는 알베르투스가 1250년에 레겐스부르크의 주교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파리에서 토마스와 함께 가르쳤던 그의 동료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피에르 타렁테즈(Pier Tarentaise)는 추기경이 되었다가, 나중에 교황(인노첸토 5세)이 되었다.
비테르보에서 토마스는 또 다시 겨우 2년 동안만 머물렀다. 그것은 호헨슈타우펜의 마지막 황제인 콘라딘(Konradin)의 비극적인 종말이 일어난 시기였다. 그때 토마스는 『군주통치론』(De regimine principum)을 집필하였는데, 거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왕들의 보상에 관한 멋진 장이 포함되어 있다.
- 1263년에 토마스가 수도회 관리를 위해 다시 두 번째로 파리로 소환된 것은 13세기의 관행 전체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성적 역량을 갖춘 사람, 그리고 어쩌면 흔들릴 수 없는 평온함을 지닌 사람을 대학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세 번째로 파리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여기서 한 탁발수도자로서 토마스가 (긴 생애 동안 거의 유럽 전체를 걷고 또 걸었던, 그래서 “장화”라는 별명을 얻은)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 모든 여정들을 (물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던 때를 제외하고는) 도보로 했다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온 교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나 되는 대립적인 파벌 싸움이었다. 탁발수도자들을 거슬러 벌이던 전투는 그치고, [논쟁은] 강좌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 대신에 이제 공격은 수도회의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원리들로 향했다. 핵심 주제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촉발된 두 가지 추가적 파벌은 이른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대립적인 이론들과 그들이 촉발한 갈등들을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토마스는, 그 부과하는 평온이 그것들을 둘러 싼 잡음과 소요와 비례해서 자라나는 사람들의 부류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가 평정을 잃어버리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 그와 같은 수도원에서 오래도록 함께 살았던 한 동료 수도자의 언급이다. 모든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의 이 시기의 엄청난 생산성은(한 번 더 말하지만 그것은 기껏 3년간의 기간일 뿐이다) 우리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간다. 이 짧고 전투로 얼룩진 시기에 토마스는 여러 논쟁적 전단지들을 작성하는 것에 덧붙여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모든 주요 작품들에 대하여,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모든 서간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서에 대해서도 두툼한 주해서들을 집필하였다. 그는 덕에 관한 위대한 『토론문제집』(Quaestiones Disputatae)을 집필하였고, 신학 전체에 대한 짧은 요약으로서 『신학 요강』(Compendium Theologiae)을 집필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학대전』의 수많은 논고들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들 안에서 토마스는 지성적 투쟁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거론된 작품들은 대부분 그 투쟁에 대한 기여들이다. 1272년에 그의 장상들은 (명백히, 어떤 갑작스런 결단에 입각해서) 그를 파리로부터 불렀을 때,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저 투쟁의 열기를 누그러뜨리는 것이었다. 어쨌든 교육 강좌에서 그를 계승한 계승자는 좀더 강하게 아우구스티누스주의로, 곧 전통적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또한 파리에서의 성 토마스의 학생들 사이에는 피렌체의 도미니코 회원인 레미지오 데 지롤라미(Remigio de' Girolami)가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같은 동향 시민인 단테(Dante Alighieri)의 스승이 된다.
토마스는 다시 한 번 더 수도회의 기숙사를 설립하라는 사명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그가 처음으로 결단을 내렸던 장소인 나폴리였다. 그런데 이듬해에 교황은 그를 리옹에서 열리는 새로운 일반 공의회에 소집했다. 1273-74년 겨울의 끄트머리쯤에 토마스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여정에 착수하였다. 도중에 그는 치명적인 중병에 걸려, 포싸노바(Fossaanova)의 시토회 수도원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짧은 기간 뒤에 선종(善終)하였다. 아직 채 50세도 다 채우지 못한 나이였다. 같은 해의 나중에 보나벤투라도 그 두 사람이 함께 초대받았던 바로 그 공의회에서 선종하였다.
시성(諡聖) 절차가 진행되던 때에 포사노바의 원장은 서약을 하고 나서 자신의 공동체가 성 토마스의 장례식 때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를 거행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고백자를 위한 ‘의인의 입’(Os justi) 미사를 봉헌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 입당송은 이렇게 시작된다: “의로운 이의 입은 지혜를 명상할 것이고 그의 혀는 심판을 말할 것이다. 그의 하느님의 법이 그의 마음속에 있으니.”
인품
- 성 토마스의 업적은 13세기 전체를 통 틀어 가장 비인칭적이라고들 말해왔다. 그의 30권짜리 『전집』(Opera Omnia)에서는 직접적으로 사적인 정보를 알려주는 단 한 가지 흔적도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 부재(不在)를 그의 인품을 비추어 주는 거울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 토마스의 유일한 편지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상당히 의미가 깊지만 말이다. 그 편지를 그는 죽기 직전에 몬테 카시노의 대수도원장에게 썼다. 그렇지만 이 유일한 편지는 욥기에 대한 그레고리우스의 주해서에서 본문 해석상의 까다로움을 다루고 있어서, (괴테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 있는 실존의 직접성(das Unmittelbare)을 간직”하였다가 그것을 우리에게 드러내기에는 전문가의 견해에 대한 표현들이 지나치게 많다.
그렇지만 토마스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와의 직접적인 만남으로부터 성인의 특질들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특유의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키가 크고, 곧은 자세를 유지했으며, 강하면서도 동시에 감각적이었다. 그의 이마는 힘있고 지휘하는 사람의 것이었고, 그의 피부는 잘 익은 밀처럼 윤기가 돌았으며, 그의 얼굴은 결코 꺼지지 않는 광채로 빛났다. 이 수사의 특별한 성덕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의례 머리를 곧추 세운 채 수도원 뜰을 활보하며 홀로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시성 과정에서 평소 토마스와의 친분이 오래고 두터웠던 증인들은 범상찮은 금욕이나 극기 훈련에 관해 보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토마스가 평화를 사랑하였고, 자기 자신을 다그치지 않았으며, 겸손하였고 자신의 동료들를 향해서는 언제나 선의로 가득차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가난을 사랑하였고, 그의 마음은 온전히 신적인 것들로 향하고 있었다. 서른 명이 넘는 증인들이 한결같이, 그리고 일부는 가장 먼저 언급한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정결’(castitas)이다. 성 토마스는 순수성과, (그와 만나게 되는 모든 이들이 어떤 신선하고 시원한 미풍과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런 인품의 방향(芳香)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 토마스가 성 요한 성에 홀로 갇혀 있던 때에 그의 형들은 탁발수도회원이 되려는 동생의 결단을 돌려놓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그를 감금한 두 형 가운데 하나인 레지날도는 특별히 자국어로 사랑의 시를 쓰는 것으로 알려진, 당대에는 제법 이름 있는 시인이었다. 한 스웨덴 학자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이 시들을 묶어 출간하였다.) 어느 날 형제들은 토마스의 방으로 행실이 나쁜 여인을 들여보냈다. 우리는 다만 그가 그녀를 거칠게 내쫓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스무 살 짜리 젊은이는 그 짧은 순간에 무서운 내적 투쟁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굴리엘모 토코(Guglielmo Tocco)는 이렇게 말한다: 토마스는 즉각적으로 자기 방의 문턱에 주저 앉아 탈진하여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크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그 외침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작업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 천사가 미래의 모든 불결한 유혹에 대해서도 끄덕없도록 만들기 위해 그의 허리를 띠로 단단히 묶고 있었다. 그의 생애 말년 즈음에 토마스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친구이자 비서인 레지날도 피페르노(Reginaldo Pipperno)에게 말해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한 사람이 진실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자신의 뇌를 다소 왕성하게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지식에 대한 ‘금욕주의적’ 접근을 거의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을 아는 것과 순결성의 조건을 묶는 밀접한 유대에 대한 자각을 상실하였다. 토마스는 부정(不貞)의 맏딸이 영의 맹목이라고 말한다. (4)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만이, 다시 말해 사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 불순하고 이기심으로 타락한 ‘쾌락에의 의지’는 영의 단호함과, ‘실재의 언어’에 침묵의 주의를 기울일 정신의 능력을 둘 다 파괴한다.
이 언어를 지각하는 것, 다시 말해 실재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 토마스의 진정한 열정이다. 이 근본적 성격 특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놀라운 용기와 못지않게 놀라운 겸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토마스가 전통적인 철학적-신학적 추세를 거슬러 이교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편을 들었을 때(이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결단이다), 그는 이것을 전통적 가르침에 반대하려는 정신이나 어떤 광신적인 쇄신 추구에서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용맹한 진리 접근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안에서 실재의 목소리를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동일한 용맹함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욥기 주해서』에서 욥이 주 하느님과 나누는 용감한 대화가 존중심을 침해하지 않았는지를 묻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그는 거의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진리는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하게 말하는 사람은 그의 적이 누구이든지 간에 패배하지 않는다.
이 용기의 또 다른 면을 그의 마지막 파리 체류기에 속하는 한 사건이 보여준다. 그 시기는 온 유럽의 눈이 온통 그에게 쏠려 있던 시기였다. 그의 가르침의 일부 논쟁적 요점들에 대한 공개적이고 형식적인 토론의 기회에 토마스는 자신의 논거들을 평온하게 제시하고 나서, 그것들을 주저없이 파리의 주교와 대학 당국의 결정에 내맡겼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 불같은 프란치스코 회원인 요한 페캄[Johan Peckam]이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는데, 그는 당시 토론에서 토마스의 논적으로서 그 일에 대해 크게 감탄하며 상기하였다.) 만일 당시 교수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던 토마스가 그렇게 겸손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소박한 자세보다는, 오히려 진리에 직면할 용기(곧, 한 명제 안에서 그 전제들이 보장하는 것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딱 그만큼만 보려는 용기)를 보아야 한다. 배척될까 두려워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인정받으려 들지도 않는 이 평온한 용기야말로 토마스가 행복하게도 모든 자기중심성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그가 쓴 한 기도문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하느님께 경솔함에 떨어지지 않고 또 거드름 피우지 않고 성숙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기를 청하고 있다.
- 우리는 한 지성적 토론회에서 펜싱 경기나 아니면 적어도 승자와 패자가 있는 어떤 경연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흔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토론회는 그런 경연 규칙들에 따라 이루어진다. 토마스는 누군가가 아베로에스나 시제 브라방에 대한 그의 “승리”에 대해 말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거드름 피우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지성적 토론이란 승리를 위한 공동의 노력이었지만, 경쟁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승리가 아니라, 진리의 승리를 위한 공동 노력이었다. 그는 잘못된 파티조차도 공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류도 역시 진리를 조명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대되는 입장들을 내세우는 논적들과의 토론에서 토마스는 모든 투쟁적 신호들을 철폐(?violate)한다. 그가 적수에게 도전하는 것은 그의 입장 가운데 가장 커다란 약점이 아니라(이것은 이름 값보다 훨씬 더 고상한 토마스에게 너무도 값싼 과정이다), 정확히 그의 가장 강한 논거가 자리잡고 있는 영역이다. 가끔은 토마스가 처음으로 이 논거들의 실제적 강점을 드러낸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의 적수들의 반론들이 그를 통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이리하여 『대이교도대전』과 같은 작품을 연구하면서 한 용감한 정신이 본질적 문제들을, 우회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경험이다.
- ‘토마스와 진리’라는 주제를 접촉하면서 ‘진리의 교사’로서의 그의 헌신에 관하여 [23]침묵하는 채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한 사람을 오류로부터 진리로 인도하는 것을 그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봉사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그의 가르침이 그의 삶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기도와 희망보다 더 강하게 토마스 교수를 성격 규정하는 것은 없다. 일단 그가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자 그의 삶 자체도 그로부터 떠나갈 것이다. 교육은 토마스에게 한두 가지 방법으로 “탐구의 발견들”을 덧붙이는 것과는 다르고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탐구 방법들과 샛길들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탐구 결과들에 대한 한 사상가의 보고와는 다르고 또 그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이다. 교육이란 살아 있는 이들 사이에 계속되는 과정이다. 교사는 사물들의 진리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진리를 알기를 갈망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들도 바라보아야 한다. 진리 사랑과 인간 사랑, 오직 이 두 가지가 교사를 구성하는 유일한 요소이다. 성 토마스의 업적 전체 가운데 어느 작은 부분도 친구들의 요구들에 대한 응답으로 쓰이지 못했다. 때때로 그것은 어떤 군주의 요청이었고, 종종 그것은 어느 누구도 요청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번은 베네치아 출신의 신입 회원인 젊은 동료 형제가 따로따로 분리된 36개 이상의 문제를 그에게 제시하였는데, 그것들은 명료하게 정식화된 것도 아니었고, 4일 안에 대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더 중요한 작업이 그에게 부과하고 있던 과도한 요구 때문에 정당하게 양해를 구할 수 있었지만, 그 답변들을 일일이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질문들을 좀더 간결하게 정식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요구한 시한도 지켰다.
교육은 다른 무엇보다도 조사와 단순화 역량과, 초심자의 전제로부터 생각할 줄 아는 역량과 노력을 요구한다. 이 진정한 단순화 역량을 성 토마스는 고도로 소유하고 있었고, 자기 학생들의 관점을 전제로 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의 생애의 최선의 에너지와 최선의 부분들은 “탐구” 작업에 쏟은 것이 아니라 초심자들을 위한 교재에 쏟았다,(하지만 그것은 가장 깊은 진리 침잠의 결과였다.) 『신학대전』은 “머리말”에서 여러 차례 명시적으로 언급된 것처럼 “초심자 교육을 위하여”(ad eruditionem incipientium) 집필되었다. 이 머리말에서 토마스는 지나치게 친숙한 데에서 오는 성가심, 잘못 자리잡은 과도한 박식 때문에 초심자들이 경험하는 혼란 등을 언급한다. 동시대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성 토마스의 교육 방법은 정확히 그 신선함과 독창성을 통해서 그의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그랍만(Martin Grabmann)을 인용하자면, 토마스는 13세기에는 이미 전통이 되어버린 ‘스콜라학적인’ 시시콜콜 따지기의 덤불을 제거한 첫 사람이었다.(사실, 그것은 후기 스콜라학에 의해서 또다시 번창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조사와 단순화의 역량이 『신학대전』의 3부 구분 속에서 드러나는지! “제1부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제2부에서는 영적 피조물의 하느님을 향한 귀환 여정에 대해서, 그리고 제3부에서는 인간인 한에 있어서 우리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되어 준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생명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의 ‘요약’을 포괄하고 있는 가령 다음과 같은 명제 속에 얼마나 강력한 단순화의 힘이 있는 것인지: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지식이 필요하다. 그가 믿어야 하는 지식, 그가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지식, 그가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에 대한 지식. 첫 번째 지식은 우리 신앙의 신경들을 통해 가르쳐지고, 두 번째 것은 주님의 기도 안에서, 그리고 세 번째 것은 계명들 안에서 가르쳐진다."
- 이 원대한 정신 안에서, 실재를 그 깊이까지 조사하고 파악하고 조명하기 위한 타고난 선물의 내밀한 결합과, 그것에 영감을 받고 설득력 있는 교사로서의 형상을 줄 수 있는 역량은 압도적으로 『대이교도대전』 제4권의 간명하게 정형화된 제11장 안에서 명백해진다. 심지어 토마스 자신의 작품 안에서조차도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이 장에서, 그는 실재 전체의 질서 있는 구조를 묘사하는 일에 착수한다. 돌[石]로부터 천사와 하느님 자신에게 이르기까지 참으로 매혹적인 고도의 직관으로 축조할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이런 목적을 향한 출발점으로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본성들의 다양성에 따라 우리는 사물들 안에서 유출(emanatio)의 다양한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본성이 더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그 본성에 더욱 내밀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 안에서 무기물은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것들 안에는 어느 하나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가하는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런 유출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외부적 물체가 불에 의해서 변하고 불의 성질과 종류로 변할 때, 불이 불에 의해서 산출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영혼을 지니고 있는 물체들 가운데 다음 자리는 식물이 차지한다. 그리고 이 유출에서 얼마간 내부에 있던 것으로부터 전개된다. 즉 식물의 내적 습기(humor)가 씨앗으로 전환되고 또 땅에 뿌려진 그 씨앗이 초목으로 자라나는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미 생명의 첫 등급을 발견한 셈이다. 왜냐하면 생명체들은 스스로를 활동으로 옮기는 자들이지만, 오직 자기들 외부에 있는 사물들만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전적으로 생명을 결(缺)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물들 안에서는 ‘그들 내부에 있는 것이 어떤 형상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이 생명의 표지이다.
식물들의 생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다. 그 이유는 비록 식물들 안에서 유출이 내면에 있는 것으로부터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그 유출에서 차츰 드러나는 것은 결국 완전히 외부적인 것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나무들로부터 처음으로 솟아난 습기는 꽃봉오리가 되고, 마침내 그 나무의 껍질과는 구별되지만 아직도 그것에 매달려 있는 과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일이 익었을 때, 그것은 나무로부터 온전히 분리된다. 그것은 땅으로 떨어지고, 그 씨앗 능력은 다른 나무를 낳는다.
이 점을 조심스럽게 고찰한다면, 본래적으로 이 유출이 그 외부에 있는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무의 내면적 습기는 뿌리들을 통하여 (그 나무가 영양을 얻는) 땅으로부터 흡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목들의 삶을 넘어 보다 고등한 등급의 생명이 있다. 감각적 영혼의 생명이다. 그것의 유출은 어떤 외부적 시작을 가질지 모르지만, 내부적 종결을 가지고 있고, 그 유출이 더 충분히 전개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내면적인 것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외부 감각 성질들은 그 형상을 외부 감각(기관)들에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이 외감들로부터 그것은 상상력과, 더 나아가서는 기억 창고로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출의 각 단계마다 시작과 끝은 각각 다른 것들을 가리킨다. 어떤 감각적 능력도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생명 등급은 초목의 생명보다 더 고등하다. 그 작용이 내면에 있는 원리들의 테두리 내에서 발생하는 만큼 고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적으로 완전한 생명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출은 언제나 어떤 앞선 것으로부터 그 다음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성 안에 있는 것이 최고의 완전한 등급의 생명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적 삶 속에서조차도 다양한 등급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 지성은, 비록 그것이 자기 자신을 알 수 있기는 하지만, 그 지식의 첫 시작을 바깥으로부터 취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명백하듯이,(제2권 제60장) 그것은 감각상(phantasma)이 없이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 속에는 더욱 완전한 지성적 생명이 자리잡고 있다.
천사들 안에서 지성은 어떤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자기 인식으로 전개하지 않고, 그 자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안다.(제2권 제96장 이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속하는 최종적 완전성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비록 인식되는 지향이 전적으로 그들의 내면에 있다고 하다라도 인식되는 바로 그 지향은 그들의 실체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서 인식(이해)은 존재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이 점은 곧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제2권 제52장)
그러므로 생명의 궁극적 완전성은 신에게 속한다. 그분 안에서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제1권 제45장) 인식이 존재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신 안에서 인식되는 지향은 신적 본질 자체여야 한다. ...
- 그 진정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이 유효하게 구성된 구절을 라틴어로 들어야 한다. 성 토마스의 언어는, 우리가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 안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어떤 예술품에 고유한 아름다움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어떤 완전한 도구가 아름답듯이, 아름답다. 그렇지만 성 토마스의 작품들 안에는 그 문장들이 결론(conclusio)을 향하여 그토록 운율 있는 어조로 움직여 가는, 그래서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오르간 둔주곡에서 마지막 운률의 정해진 음폭과과의 비교가 가장 적절하리라 생각될 수 있는 수많은 장들이 있다. 만일 인도주의자들의 어떤 피상적인 판단이 선언한 것처럼, 언어의 비밀이 그리스도교에 「엎드려 흠숭하나이다」(Adoro Te devote)라는 찬가를 선사한 사람에게 금지되었어야 한다면, 참으로 이상할 것이다.
세계관
- 우리는 이미 파리 대학에서 토마스가 옹호해야 하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 반대되는 두 가지 이론을 언급한 바 있다. 그것들은 첫 번째 것은, 일차적으로 철학적이지만 신학적이기도 한 전통적이고 지배적인 추세로서, 우리가 흔히 ‘아우구스티누스주의’라고 부르는 입장이고, 두 번째 것은 ‘라틴 아베로에스주의’라고 부르는 입장이다. 이 두 대립되는 이론들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어쩌면 성 토마스의 가르침 특유의 성격을 명료화할 최상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사이의 투쟁에서 가장 치열하게 공방을 벌인 쟁점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토마스는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을 가르쳤는 데 반해,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인간 안에 다수의 형상적 원리들이 있다는 것을 수용한다. 토마스는 영적인 인식과 하느님에 대한 인식까지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인식이 감각 지각으로부터 출발’하고 따라서 언제나 얼마간 그것에 의존하는 채로 남아있다고 주장하였는 데 반해,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영적 인식이 감각 지각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학파들’ 사이의 한 작은 투쟁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그것은 가시적(可視的) 실재로서의 창조를 그 어떤 환원, 평가절하, 또는 순수한 무화(無化)로부터 구해내는 것 못지않은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성 토마스의 이 두 명제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인간 안에 ‘참다운’ 인간인 한 부분(영혼)과, 영혼의 도구이거나 심지어 영혼의 감옥인 어떤 분리된 실재(육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육체와 영혼은 하나의 직접적인인 실존 단위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인간이 영혼만이 아니라, 정확히 육체와 영혼의 이 실존적 단일성이다. 육ㅊ테는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두 번째 명제는 우리 인식의 최종적 담지자가 영적 영혼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으로 합성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존재의 한 모상(image)이다. 인식은 우리의 존재 자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원리들과 육체적(감각적) 원리들의 해소될 수 없는 단일성인 것이다.
이 명제들은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 안에서는, 이미 지적한 것처럼, 성 토마스의 그토록 특징적인 자연적 창조 실재에 대한 저 긍정(모든 창조된 것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두 선하다)이 반영된다. 같은 이유로 그것들은 그 고유의 어떤 실재와 효력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 안에 “영적인” 또는 “종교적인” 요소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무시되거나 말소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 안에 있는 창조의 실재, 그의 이성의 자연적 빛, 그의 오감, 그의 존재의 모든 능력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간의 구성 안에 그 자리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 혹자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얼마든지, 이 위대한 성인이자 신학자에게 마땅한 존경심을 훼손함이 없이,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아주 쉽사리 그의 작품(업적)이 가시적인 창조 질서의 현실성을 깎아내리고 평가절하한다는 의미로 이해되거나 오도될 위험에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토마스는 또한 원죄를 통해서 창조 질서가 입은 상처를 잘 알고 있다. 실상 그는 심지어 인간이 창조된 사물들의 참다운 존재를 보다 깊이 인정하면 할수록 이 인식은, 모든 창조된 실재로부터 구원에 대한 어떤 위협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 더욱 슬픔의 원천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또한 새로운 질서를 확립한 동일한 그리스도가 동시에 최초의 창조의 영원한 원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요한 서간 주해』에서 성 토마스는 우리가 성경에서 “세상”(mundus)이라는 용어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하느님의 창조로서의 세상이고,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창조로서의 세상이며, 셋째는 창조 질서의 물질적 타락으로서의 세상이다. 마지막에 지적한 ‘세상’에, 오직 이 세상에만, “세상은 사악함 속에 자리잡고 있다”(1요한 5,19)는 사도 요한의 말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첫 번째 의미(창조)가 세 번째 의미(창조 질서의 물질적 타락으로서의 세상)과 동일시되거나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성 토마스의 주장이다. 창조로서의 세상은 사악함의 자리가 아니다.
단 하나의 공통 분모가 이 모든 명제들 밑에 깔려 있다. 창조 질서를 그 모든 영역에서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한 응답이다. 이것이 인간 안에 있는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이라는 그의 명제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이것은 또한 초자연적 신앙과 신학에 비추어 본 자연적 이성과 철학의 참된 위치에 관한 성 토마스의 가르침의 토대이다. 창조의 전체에 대한 그의 긍정의 관점으로부터 혹자는 『신학대전』에서 그가 목욕과 잠을 영혼의 우울감에 대한 치료제로 추천하고 있는 경우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성 토마스에 관한 체스터튼(Gilbert K. Chesterton의 책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언급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만일 카르멜의 전통에서처럼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같은 적절한 수식을 토마스에게 적용한다면 가장 적절한 것은 “창조주의 토마스”(Thomas a Creatore)가 될 것이다.
- 오직 우리가 참으로, 성 토마스의 의도가 언제나 창조주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만, 우리는 그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평가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 토마스에게 (그가 그를 따르는 만큼) 자연적 창조 실재의 맑은 거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자연적 우주의 ‘질서’가 그 안에 새겨져 있는 한 위대하고 풍요로운 정신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작품)을, 한 학파가(‘토마스’ 학파도 예외가 아니다) 그 창립자의 업적을 대하는 통상적인 태도보다 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세로 대했다.
성 토마스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헬레니즘화’를 말하는 것도 역시 정확한 것이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교 신학으로부터 추정된 헬레니즘화한 스콜라학적 요소를 “정화”하려고 시도하였을 때,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으로부터 창조의 실재 자체를 제거할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그리고 예컨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엄밀하게 ‘개혁적인’ 신학 안에서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명백하다.) (루터[Martin Luther]가 비텐베르크의 시장 한복판에서 교황의 칙서와 함께 『신학대전』도 불태웠다는 것은 비역사적인 전설이다. 그렇지만 그 사건의 진정한 이야기가 좀더 요점을 담고 있다. 저 ‘소각’(auto-da-fe)에 대한 최근에 발견된 보고는 교황의 문서와 함께 『대전』을 불태우려는 의도는 있었지만, 그 복사본을 기꺼이 내놓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성 토마스의 신학에서 창조의 실재에 대한 긍정은, 진정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세속화이거나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는커녕, 그리스도교적 직관의 바로 심층부로부터, 다시 말해 하느님의 육화(肉化)의 실재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복음사가 요한은 육체가 악이라는 마니교도들의 원리를 배제하기 위해서 신중하게 ‘말씀’이 ‘살’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 모든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뿌리가 세상을 향한 성 토마스의 개방을, 그의 두 번째 좀더 위험한 논적인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의 참으로 세속화하는 개념들로부터 차이나게 만든다.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위대한 아랍 주해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여기서 가르침의 세세한 요점들(만민 공통의 지성 단일성, 세상 영원성, 자유 의지의 부정 등)에는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없다. 결정적인 점은 아베로에스주의가 근본적으로 신앙과 이성, 철학과 신학 사이의 연결을 끊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신앙과 신학으로부터 철학적 사고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그것은 이 분리된 철학적 사고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였다.
그것이 그 안에서 참되고 궁극적인 지혜, 곧 세상과 인생의 의미를 추적하는 인간의 정신을 만족시켜줄 대답을 발견하리라 기대하는 한에서. 이에 대해 성 토마스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바깥에서 지혜를 찾아서도 안 되고, 또 발견하지도 못한다. 단 하나의 유일한 은총이 그실존적 가치에 있어서 자연적 우주 전체를 능가한다.
우리는 사고의 이 결정적인 세속화에 의해서 라틴 아베로에스주의는 근본적으로 르네상스와 따라서 근대철학 및 과학 일반의 선구자라는 것을 감지한다.
이 가족 유사성은 그 특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것으로 확장된다. 라틴 아베로에스주의에서는 철학 해석에 있어서 순수하게 역사적인 접근법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곧 철학의 진정한 대상이 그 자신의 역사라는 견해이다. 파리 대학 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지도자인 시제 브라방(Siger de Brabant)에게 철학 연구는 그것이 참인지 아니면 거짓인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적인 철학 체계들의 탐험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 참된 주제인 실재를 논하는 대신에 전혀 다른 것 곧 철학들을 논하는 근대적 유형의 철학자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교회의 ‘보편적 스승’ 자신을 한 단순한 ‘역사적’ 현상으로 취급하려는 여하한 시도도 처음부터 근절하기 위해서는, 토마스가 시제 브라방에게 준 위엄있고 고무적인 반박이 토마스에 대한 모든 번역과 해석의 머리말이 되어야 한다: “철학 연구는 다른 이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 이 일의적이지 않은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토마스와 아베로에스주의 사이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세속화된 논적과 혼동되는 것이 분명 토마스의 운명이다. 예컨대 성 토마스가 죽은 지 3년 뒤에, 그의 작품들로부터 잘못 해석된 여러 명제들이 파리의 주교에 의해서 단죄되었고, 아베로에스주의의 오류들과 동일한 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때 이후에 토마스가 교회에 의해서 시성(諡聖)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랍만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또한 신학자이자 교수로서 시성된 첫 사람이기도 하다. 더욱이 토마스는 장엄하게 ‘교회의 박사’로, ‘교회의 보편 박사’로 선포되었다. 비오 11세는 그에 대해서 교회가 다양한 방법으로 그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르침으로 삼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이 잠재적으로 이교적인 세속성에 물들었다는 검열은, 기욤 생타물이 알베르투스와 그의 위대한 제자에 대해 “그들은 신적 지혜를 스스로 뽐내지만, 사실은 세속 지혜에 더 친숙하다”고 라고 쓴 이래로 지속되고 있다. 그에게 토마스는 이렇게 응수한다: “신앙의 진리에 대해, 그것이 그가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해석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창조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라고 말하는 저들의 견해는 ... 명백히 거짓이다.”
이 검열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성 토마스가 자연적 이성에 두는 신뢰는 그리스도교적 규범을 넘어 간다; 그의 철학과 신학은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참으로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다; 그들은 모든 문제들에 대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손쉬운 ‘해결책’들을 제공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의 삼단논법들의 거친 햇빛이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우리 신앙의 어두운 작열(?glow)을 앗아가며; 초자연적 진리 안에 있는 신비적 요소가 거의 전부 억압되고 그 추정적으로 증명 가능한 합리성이 선호된다.
“성 토마스의 가르침에 따른” ‘신-스콜라학적’ 또는 ‘토미스트적’ 개진들의 상당 부분이 이런 반론들의 실제 원인이자 겉보기의 정당화를 제공한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토마스 자신은 창조에서도 하느님 안에서도 신비를 인정하는 데 있어서 멀리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하느님의 파악-불가능성이라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한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신학대전』에서 그토록 용맹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지적된 우리의 무지(無知)를 발견할 때 경종의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관한 그의 가르침의 이 ‘요약’에서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는 없고 다만 그분이 무엇이 아니신지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이 어떠하신지에 대해서는 관상할 수 없고 다만 그분이 어떠하지 않으신지에 대해서만 관상할 수 있다.” 명백히 토마스는 “부정 신학”의 이 기본 사상을 초심자로부터도 억류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토론문제집』에서는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자신이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에 관한 인간의 궁극적 지식이다.”(Hoc est ultimum cognitionis humanae de Deo; quod sciat se Deum nescire)
토마스주의자들 가운데 자주 회자되는, 한 의미심장한 사실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 토마스는 논리를 두려워한다기보다는 신비를 두려워했다. 용감한 논리의 빛을 두려워하는 자는 참된 신비들의 영역을 결코 관통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성이 실제로 실패하는 저 경계 너머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성 토마스의 업적(작품)에서 피조물의 모든 인식 방식은 그 바로 끝, 곧 신비의 경계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인식의 길들을 더욱 강렬하게 추적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우리에게 ‘어두움’도 드러나지만, 또한 신비의 ‘실재’도 드러난다.
마지막은 침묵이다
- 성 토마스의 마지막 말은 대화가 아니라, 침묵이다. 그리고 펜을 그에게서 앗아가 버린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의 혀[舌]는 하느님의 신비 안에 있는 생명의 지극한 풍요로움에 의해서 잠잠해졌다. 그가 침묵하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그 어떤 인간의 생각이나 말도 도달할 수 없는 저 신비의 형언할 수 없는 깊이를 엿보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시성 과정의 기록에서는 이렇게 전해준다. 1273년 성 니콜라오 축일[12월 6일]에 토마스는 거룩한 미사를 봉헌한 다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상하게도 변했다. 그는 계속해서 침묵했다. 한 글자도 쓰지 않았고, 한 마디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던 『신학대전』을 옆으로 치웠다. 갑자기 고해성사(confessio)에 관한 논고를 한창 집필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그는 ‘붓을 꺾었다.’ 그의 친구인 레지날도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신부님, 어떻게 당신이 이토록 위대한 작업을 중단할 수 있어요?” 토마스는 그저 대답할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어.” 레지날도 피페르노는 심각하게,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가 압도적인 일의 부담으로 정신적 병을 얻은 것이라고 믿었다. 한참이 지난 다음 그는 다시 한 번 더 묻고, 대답을 재촉하였다. 토마스가 답했다: “레지날도,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어. 내가 지금껏 쓴 것들은 모두 나에게 지푸라기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져.” 레지날도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토마스는 전에도 가끔 했듯이, 살레르노 근교에 있는 자신의 여동생 산 세베리노 백작부인을 방문한다. 그것은 성 토마스가 어언 30년 전에 성 요한 성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할 때 그를 도왔던 바로 그 여동생이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여동생은 깜짝 놀라 그의 여행 동료인 레지날도를 향해 “오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물었다. 토마스는 마치 벙어리가 된 것 같았고, 그녀에게 거의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레지날도는 다시 한 번 더 토마스에게 호소하며, 왜 집필을 중단하였는지, 그리고 그를 그토록 깊이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다. 토마스는 한 동안 침묵하는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에 말했던 것을 되풀이했다: “내가 이제껏 쓴 것은 모두 ... 내가 본 것과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하면, 내게는 지푸라기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져.”
이 침묵은 겨울 내내 지속되었다. 서방의 가장 위대한 교수가 벙어리가 되었다. 무엇이 그를 어떤 깊은 행복, 영원한 생명의 시작의 암시로 물들였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그 사람 안에 부자연스러움에서 야기된 혼란스런 느낌을 동반하였음에 틀림없었다.
완전히 자기 자신 깊숙히 침잠하여 지낸 이 시기의 끝에, 토마스는 초대받은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긴 여정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주의는 계속해서 내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성 과정을 기록한 문서는 이 여정에서 토마스와 레지날도 사이에 나눈 한 대화를 보고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긴 침묵으로부터 솟아올랐다가 곧 다시 긴 침묵으로 빠져든 것 같았다. 이 짧은 대화는 이 두 친구가 이미 얼마나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레지날도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이제 우리는 공의회에 참석하러 가는 중인데, 거기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 같지 않아요? 교회 전체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회를 위해서도, 그리고 시칠리아 왕국을 위해서도 말이지요.” 토마스가 답한다: “그래. 거기에서 좋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하실거야.”
그의 삶이 그의 교육 이력을 넘어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토마스의 기도는 받아들여졌다. 리옹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선종(善終)을 맞았다.
이 죽어가는 사람의 정신은 포사노바(Fossanova)의 수도자들을 위한 『아가서 해설』에서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러므로 성 토마스의 마지막 가르침은 하느님을 향한 신부(新婦)의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이 사랑에 대해 교회의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상징적 대화의 의미는 하느님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모든 소유 역량을 넘어간다는 것, 우리의 모든 인식은 기껏 새로운 질문들의 원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모든 발견은 다만 새로운 탐구의 출발점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